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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기와 ‘Stone and so forth’

 박현기는 1983년 수화랑에서 나체상태의 자신의 가슴과 배에는 ‘Stone and so forth’, 등에는 ‘I’m not a stone’이라고 적은 후 크고 작은 돌들로 가득 채워진 전시장을 돌아다니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관람객이 없는 텅 빈 갤러리에서 조명과 비디오를 켜둔 채, 나체 상태로 돌무더기 사이를 비집고 돌아다니다가 돌을 들어올려 표면을 만져 보기도 하고, 자신이 돌인 듯 웅크려 돌과 머리를 맞대기도 한다. 퍼포먼스가 끝난 자리에는 돌들을 원형으로 줄지어 놓고 그 가운데에 천장에서 늘어트린 마이크를 설치한 후, 관람자가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내는 소리 등을 확성기로 재생시켜 놓았다. 돌들이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돌들에 헤드셋을 씌워 놓기도 했다.

 

박현기가 하고자 한 것

박현기는 1942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하여 해방 후 귀국해 대구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홍익대 회화과를 중도에 그만두고 건축과로 전공을 바꾸어 졸업하였고, 1960년대 후반 대구에 정착하여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며, 작품활동을 하였다.

“우리 전통의 뿌리를 버리고 맹목적으로 수입된 남의 구조를 접목시키려는 사대주의적 근성과 시행착오로 발생하는 사회의 제도적 환경으로부터 잘못 형성된 나 자신을 깨닫고 늦은 감은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다시 거슬러 새로이 출발하겠다는 결심을 했으며, 그때까지의 시간들을 정리하고 새롭게 ’우리‘ 즉 ’나‘라는 입장, 나의 정신적인 현주소를 찾아 60년대 후반 나는 대구로 향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나의 결심은 지금도 후회 없는 판단이라 생각된다.”(《미술과 테크놀로지》, 예술의 전당, 1991, p. 40.)

1970년대 ‘정체성’은 많은 한국 미술가들에게 중요한 과제였다. 1970년대 중반 한국미술의 성격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식된 단색회화 역시 전면에 내세웠던 것은 한국적 정체성이었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서양미술이 도입된 이래 뚜렷한 전후 맥락 없이 양식을 수용하기에 급급했던 국내 미술계의 태도에 대한 반성으로 많은 작가들의 공감을 얻었다.

이때 한국적 정체성의 근간을 이뤘던 것은 당시 서구미술에서 보인 작가적 자의식의 지나친 강조에 대한 반감이었다. 평론가 이일은 1971년《AG전》의 시론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있어 서구의 자기 투영적인 세계관을 비판하였다. 인간 중심적인 서구의 가치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적 시각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우환이 1) 외부 세계가 그 자체 실재인 양 자연이나 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2) 작가가 최종 의미부여자라도 되듯 작가 자의식을 쏟아내는 회화 모두 거부하며 3) 작가적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외부와 관계 맺는, 이우환의 용어로 ‘자기 한정과 열려진 관계체로서의 회화’를 추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돌과 물 등 자연적 소재가 등장하는 박현기 작품의 주된 관심 역시 맹목적으로 수입된 남의 구조가 아닌 자신만의 구조로 어떻게 실재하는 것을 드러낼 것인지의 문제였다.

“완전한 대상이 그물에 걸렸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잡았다고 생각하는 그 대상은 추상의 결집이지 대상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실재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나타내는 특징은 대상을 서술하는 것, 그것에 관해 언급하는 것, 그 주위를 맴도는 것, 우리의 지적 감각에 호소하는 어떤 것을 캐내는 것, 그리고 그 대상 자체와 그것을 분리하는 것이다”

 

박현기는 이를 어떻게 구현하나.

박현기의 1983년 수화랑 퍼포먼스에서 그의 신체 앞에 쓰여 있던 ‘Stone and so forth’는 전시장 안에 있는 ‘돌과 돌 이외 다른 것’에 대한 언급으로, 이는 곧 그에게 작품의 구성 요소가 된다. 이를 신체 뒤 등에 적혀 있는 ‘I’m not a stone’과 연결시키면 작품의 구성요소로서 ‘돌 아닌 다른 무엇’은 바로 내(나의 행위)가 된다. 작가가 빠진 후 설치된 마이크로 전달되는 전시장 내 움직임 소리 역시 작품의 구성 요소가 된다.

 

박현기에게 작품의 구성 요소는 무엇인가?

첫번째는 신체의 ‘행위’다.

작가적 의식의 관여의 정도나 행위의 방식 등에 따라 작가 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당시 서구미술의 작가 주관에 대한 지나친 강조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한국 현대미술의 많은 작가들이 회화적 방식으로 찾은 것 중 하나가 신체의 행위였다. 이는 회화적 과정에서 작가가 개입하는 방식이 서구 근대미술이 그랬듯 ‘의식의 투영’이 아니라 ‘신체의 행위’라는 것으로, 신체의 행위는 작가적 의식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가장 큰 특징을 갖고 있다. 즉 작가가 회화적 과정에 개입은 하되 회화적 과정 전체를 통제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작가 의식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외부, 작가 자신을 넘어서는 세계를 품을 수 있다.

박현기에게 있어서도 이 신체의 행위는 매우 중요한 작품의 구성 요소로, 특히 손의 움직임에 매우 특별한 지위가 부여된다. 각각의 생김새가 다른 자연석들을 하나의 탑으로 쌓아 올리는 그 과정은 손끝에 온 감각을 집중시켜 맞춰 나가는 과정이다. 이 때 손은 자기 자신의 종속물이 아니다. 손을 도구시하는 그림은 신통치 않다. 손은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 있으며, 돌, 공기, 시간, 공간, 그 밖에 무수한 외부하고 관련을 맺어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중간항이자 매개항이다.

박현기는 쌓는다는 것을 ‘합(合)’으로 정의하며, 작가가 대상을 통제하는 ‘만든다는 것’과 외부에 열려 있는 ‘쌓는다는 것’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쌓는다는 것이 진정한 외부, 세계에 대한 경험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TV 돌탑은 단순히 실재와 가상의 공존, 또는 단순히 실재와 가상의 공존을 통해 실재에 의문을 제기하는 트릭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새로운 실재이고 세계이다. 박현기에게 실재가 드러나는 유일한 방식은 이 쌓음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만이다. 그 경계가 없어지는 것은 실재와 가상의 공존 혹은 침투를 통해서라기 보다 신체의 모든 감각이 귀결된, 전일한 감각을 담고 있는 손 끝의 민감함을 놓치지 않으면서 행위한 ‘쌓음’을 통해서다. 그래서 돌탑은 그 결과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두번째 작품의 구성 요소로 작가는 외부를 반영하는 매체들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외부 실재를 다양한 매체에 담아 새로운 차원의 회화적 경험을 하게 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시각에 국한되지 않고 청각과 촉각적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실재를 반영하는 매체들을 통해 반영되는 실재에 대한 경험은 시각적 충돌을 주기도 하고 공감감적 새로운 경험을 던지기도 한다. 가상과 현실을 오가는 체험, 시공간의 연속과 단절 등.

이건용 등 다른 한국현대미술 작가들에 비해 개념적 장치를 많이 활용한다는 점이 박현기의 특징 중 하나다. 물론 이러한 매체들의 역할은 외부를 그 자체로 반영하거나 서로 다른 시공간을 연결 짓는 수용체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등의 적극적인 미디어 장치와는 구분된다.

 

마지막으로 박현기에게 빠트릴 수 없는 작품의 구성요소는 돌이다.

그에게 돌은 인간의 구성에 반대되는 자연의 소여라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자연의 소여 그 자체로 머물러 있는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시간을 품고 있고 신체의 행위와 만나면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낸다. 박현기는 자신의 작업에서 돌이나 나무와 같은 개체를 쌓는 작업을 조형물(결과)로서 읽으려는 시도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며, 쌓기 행위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에 주목하고자 한다.

“쌓는다는 것은 결과의 형상(간접성) 이전에 쌓는다는 신체성에서의 체험(직접성)이 가지는 시각 외적인 것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며, 만든다는 것과 쌓는다는 것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해석되어 짐에 무관할 수 없으리라.”(1985년(추정) 박현기 드로잉북, 참조코드: MC2012.03/Ⅱb/0015)

박현기는 돌, 그리고 이를 반영하는 매체로서 모니터, 그리고 신체의 행위 이 세 개의 작품의 구성요소를 갖고,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쌓기라는 행위로서 비로서 열리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게 하고, 이를 통해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다.